2006년 05월 16일
5.18이 돌아온다.
광주에서 나고 광주에서 자란 나에게 5.18은 마치 하나의 경험인양 다가왔다.
우스갯 소리로, 나는 5.18에 잉태된 아이라 말을 하였고, 내 친구들은 5.18에 총소리를 들으며 우유를 먹었다고도 하였다. 우스갯 소리 안에서 우리는 5.18과 함께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랐다는 진실을 공유하며 커왔다. 예전에 어느 조사에선가는 80년과 빠른 81년생의광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다른 년도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폭력적이라던 그런 말도 있었다. 물론 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가 총소리와 함께 만들어진 아이들이라 그렇다고 하며 낄낄거렸다. 그것이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5.18을 처음 느끼게 된게 언젠지는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살게된 우리집앞은 늘 데모를 하는 사람들도 북적였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수건을 들고 다녔고, 넋나간 얼굴로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곤 했다. 누군가의 장례식 행렬도 본적이 있고, 최류탄에 집이 맞는것도 본 적이 있다. 그게 5.18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518을 향해 끊임없이 부르짖던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5.18망원 묘역을 간 날은 날이 아주 맑았던 봄날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마 친구들과 글짓기 대회에 나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묘역의 입구에 있던 꽃집. 꽃집의 탁자 위에 있던 두툼한 사진첩. 사진첩.. 홀린듯 펴게 된 그 사진첩은 평생을 날 따라다니게 될것임을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끔찍하고 처참했던 그들의 모습들. 많은 사람들의 시체들 시체들 시체들. 그리고 여기저기 있던 사진들. 오열하고 넋이 나가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모습들. 따뜻한 햇살을 가득 받으면서 누워있던 묘지 옆에서 나는 내가 죽은 사람이 된건지, 내가 죽은자의 가족이 된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나는 글짓기를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소설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많은 사람들이 운동가였으며 괴로워 했고, 도망가거나, 자살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티비에서 5.18 일일 체험학교가 열렸다. 난 그 후로도 항상 궁금했다. 왜? 왜? 내가 할 수 있는건 도데체 무엇인가..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일 체험학교는 내가 꼭 가야 할 곳 같았다. 그렇게 가게 된곳은 뭔가 달랐다. 아프기만 할 줄 알았었는데,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우리조는 신혼인데 죽어간 부부의 이야기를 만들었었는데,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5.18은 나에게 스며들어왔다. 이건 싸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도 아니고 한순간 끝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라는거....
-엄마는 늘 나에게 술과 담배는 절대로 안되며, 운동권만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다 -
대학에 와 처음 친하게 된 선배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나에게 민중가요를 가르쳐 주고, 금서를 빌려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문선을 추면서, 고등학교때의 했던 단체의 생활과는 뭔가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가면 안되는 세계라고 할까? 어느날 밤인가, 선배가 빌려준 금서를 읽고 있다가 아빠한테 걸린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는 내 눈앞에서 그 책을 북북 찢어버렸다. 분노와 함께 느낀건 약간의 서글픔. 내가 느꼈던건 그때의 두려움에 날 넣기 싫었던 그 사람의 마음이었을까?
대학에서의 5.18은 일상이었다. 수업시간에도, 학교안팎에서도 나는 5.18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교수님은 우연히 광주에 부임하여 5.18을 겪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 교수님의 논문의 많은 부분은 5.18 희생자의 트라우마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5.18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곳에 있던 자신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을 그리고 우리들을 보여주고 이야기 한다. 우리과는 다른학교의 같은 과와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매년 5월이면 그 사람들이 광주를 방문하곤 했다. 5.18에 관한 세미나를 하고, 묘역을 참배하고 새로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곤 했다.
한참이 지나 다시 찾은 망원묘역은 많이 변해 있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5.18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바뀌면서 작고 슬프던 묘역은 성지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난 그 묘역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약간은 정적이 흐르고, 슬픔이 배어있던 묘역은 거대한 성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관광지같은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만큼 5.18을 긍정적이고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였겠지만, 글쎄..그렇게 멋지게 만드는 것만이 그들을 기리는 것이었을까? 그것으로 그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사라졌을까?
아직도 난 518에 관련된 글을 읽으면 분노하고 슬픔에 잠긴다. 아직도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막혀있었던 그 시간들이 슬프다. 그게 광주사람의 삶이 아닐까. 벗어날 이유도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는 슬픔의 땅에 뿌리를 박고 시작한 사람들.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광주에서는 커다랗게 행사를 한다. 그들의 영령을 기리고, 518을 재조명하고, 사람들에게 그날을 다시 상기 시켜준다. 그렇게 자라난다면, 그렇게 5.18이 알려져간다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그땐 그랬지. 그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될 수 있었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 아직도 5.18은 끝나지 않은 날이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 5.18은 끝나지 않은 날일것이다. 잊을 수 없다. 잊지 않을것이다. 언젠가라도, 언젠가라도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 시작부터 끝까지 다시한번 모든것을 모두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것이, 이렇게 말해야 하는것이 내 몫일것이다.


우스갯 소리로, 나는 5.18에 잉태된 아이라 말을 하였고, 내 친구들은 5.18에 총소리를 들으며 우유를 먹었다고도 하였다. 우스갯 소리 안에서 우리는 5.18과 함께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랐다는 진실을 공유하며 커왔다. 예전에 어느 조사에선가는 80년과 빠른 81년생의광주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다른 년도에 태어난 아이들보다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폭력적이라던 그런 말도 있었다. 물론 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가 총소리와 함께 만들어진 아이들이라 그렇다고 하며 낄낄거렸다. 그것이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5.18을 처음 느끼게 된게 언젠지는 기억이 안난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가면서 살게된 우리집앞은 늘 데모를 하는 사람들도 북적였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손수건을 들고 다녔고, 넋나간 얼굴로 사람들의 행렬을 바라보곤 했다. 누군가의 장례식 행렬도 본적이 있고, 최류탄에 집이 맞는것도 본 적이 있다. 그게 5.18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518을 향해 끊임없이 부르짖던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그 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5.18망원 묘역을 간 날은 날이 아주 맑았던 봄날이었다. 중학생이었던 나는 아마 친구들과 글짓기 대회에 나갔던 것이 아닌가 싶다. 묘역의 입구에 있던 꽃집. 꽃집의 탁자 위에 있던 두툼한 사진첩. 사진첩.. 홀린듯 펴게 된 그 사진첩은 평생을 날 따라다니게 될것임을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끔찍하고 처참했던 그들의 모습들. 많은 사람들의 시체들 시체들 시체들. 그리고 여기저기 있던 사진들. 오열하고 넋이 나가고 아무것도 모르는 그 모습들. 따뜻한 햇살을 가득 받으면서 누워있던 묘지 옆에서 나는 내가 죽은 사람이 된건지, 내가 죽은자의 가족이 된건지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 나는 글짓기를 할 수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소설에 등장한 주인공들은 많은 사람들이 운동가였으며 괴로워 했고, 도망가거나, 자살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티비에서 5.18 일일 체험학교가 열렸다. 난 그 후로도 항상 궁금했다. 왜? 왜? 내가 할 수 있는건 도데체 무엇인가..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일일 체험학교는 내가 꼭 가야 할 곳 같았다. 그렇게 가게 된곳은 뭔가 달랐다. 아프기만 할 줄 알았었는데, 뭔가 다른 느낌을 받았다. 우리조는 신혼인데 죽어간 부부의 이야기를 만들었었는데, 사람들과 이야기 하고 공감하는 가운데, 5.18은 나에게 스며들어왔다. 이건 싸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끝난 이야기도 아니고 한순간 끝날 수 있는 이야기도 아니라는거....
-엄마는 늘 나에게 술과 담배는 절대로 안되며, 운동권만은 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셨다 -
대학에 와 처음 친하게 된 선배는 소위 '운동권'이었다. 나에게 민중가요를 가르쳐 주고, 금서를 빌려주었다. 친구들과 함께 문선을 추면서, 고등학교때의 했던 단체의 생활과는 뭔가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 가면 안되는 세계라고 할까? 어느날 밤인가, 선배가 빌려준 금서를 읽고 있다가 아빠한테 걸린적이 있었다. 그때, 아빠는 내 눈앞에서 그 책을 북북 찢어버렸다. 분노와 함께 느낀건 약간의 서글픔. 내가 느꼈던건 그때의 두려움에 날 넣기 싫었던 그 사람의 마음이었을까?
대학에서의 5.18은 일상이었다. 수업시간에도, 학교안팎에서도 나는 5.18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교수님은 우연히 광주에 부임하여 5.18을 겪고 인생이 바뀌었다고 했다. 그 교수님의 논문의 많은 부분은 5.18 희생자의 트라우마에 관한 것이었다. 어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5.18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곳에 있던 자신을,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을 그리고 우리들을 보여주고 이야기 한다. 우리과는 다른학교의 같은 과와 교류를 하고 있었는데, 매년 5월이면 그 사람들이 광주를 방문하곤 했다. 5.18에 관한 세미나를 하고, 묘역을 참배하고 새로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곤 했다.
한참이 지나 다시 찾은 망원묘역은 많이 변해 있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5.18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으로 바뀌면서 작고 슬프던 묘역은 성지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난 그 묘역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약간은 정적이 흐르고, 슬픔이 배어있던 묘역은 거대한 성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관광지같은 느낌도 들었다. 물론 그만큼 5.18을 긍정적이고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였겠지만, 글쎄..그렇게 멋지게 만드는 것만이 그들을 기리는 것이었을까? 그것으로 그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사라졌을까?
아직도 난 518에 관련된 글을 읽으면 분노하고 슬픔에 잠긴다. 아직도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들이 막혀있었던 그 시간들이 슬프다. 그게 광주사람의 삶이 아닐까. 벗어날 이유도 없지만 벗어날 수도 없는 슬픔의 땅에 뿌리를 박고 시작한 사람들. 매년 5월 18일이 되면 광주에서는 커다랗게 행사를 한다. 그들의 영령을 기리고, 518을 재조명하고, 사람들에게 그날을 다시 상기 시켜준다. 그렇게 자라난다면, 그렇게 5.18이 알려져간다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그땐 그랬지. 그때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될 수 있었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 아직도 5.18은 끝나지 않은 날이다. 아니, 많은 사람들에게 5.18은 끝나지 않은 날일것이다. 잊을 수 없다. 잊지 않을것이다. 언젠가라도, 언젠가라도 잊혀지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 시작부터 끝까지 다시한번 모든것을 모두가 알 수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것이, 이렇게 말해야 하는것이 내 몫일것이다.


